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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충남 예산 가야산 산행산 2010. 12. 21. 10:05
기승을 부리던 동장군이 잠시 숨을 고른 19일, 2010년 경인년(庚寅年) 한해를 마무리하는 한울산악회 마지막산행으로 충남예산군 가야산으로 찾았다.
성남한울 산악회 회원33명을 태운 버스가 2시간여를 달려 충남가야산 도립공원 주차장에 도착하니 벌써 전국에서 몰려온 산악인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충남 예산군, 서산시, 당진군에 걸쳐있는 가야산(678m)은 경남 합천의 가야산과 동명이산(同名異山)으로, 1973년 수덕산, 원효봉, 석문봉과 함께 덕산공원으로 지정됐다.
이곳 가야산은 주봉인 가야봉(678m)을 중심으로 석문봉(653m), 옥양봉(621m)은 600m급산이다.
그러나 600m급 산 치고는 높은 느낌을 주는데 그것은 내륙산과 달리 바다가 가까워 상대 고도가 높기 때문이다.
조선의 대표적인 인문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충청도는 내포를 제일 좋은 곳으로 친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은 큰 바다요, 북쪽은 큰 만이고, 동쪽은 큰 평야, 남쪽은 그 지맥이 이어지는 바, 가야산 둘레 열개 고을을 총칭하여 내포'라고 했다. 가야산은 이 내포지방 고을들을 거침없이 둘러볼 수 있는 내포지방 최고의 전망대인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서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 내포평야의 풍요로움을 주고 있으며 산새의 풍수지리로 인한 역사의 체험현장이기도 한다.
7세기,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뜻한 바 있어 당나라 유학길에 오르기 전 어느 날 밤 서해 내포(태안, 당진 서천, 예산, 홍성 등 10곳)의 한 동굴에서 목이 말라 바가지에 담긴 감로주를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그물은 감로주가 아닌 해골에 담긴 벌레 썩은 물이었다.
구토하던 원효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일체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의 화엄경구절을 깨달고 당나라 유학을 파기하고 신라로 돌아가 민중불교의 초석을 다졌다고 전해지는데 이 사건이 지금껏 전설처럼 전해졌지만 최근 충남 예산과 서산의 가야산 자락에 실제로 존재했다는 설이 제기됐다.
이것을 근거로 하는 이유는 가야봉 동남쪽에는 원효봉(677m)이 있고 산 중턱에는 원효대라는 전망대와 그 주변에는 원효암이라는 암자가 있어 원효대사가 절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오늘 산행코스는 주차장-남연군묘- 옥양봉-석문봉-가야봉-남영군 묘. 약 4시간코스다.
등산을 시작한지 10여분을 지나면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은 가야봉과 원효봉으로 오르는 길이고 오른쪽으로는 석문봉과 옥양봉으로 이어진다.
오른쪽 옥양봉쪽 도로로 접어드니 왼쪽으로 남연군 묘((충남도 기념물 제80호)가 보이고 농로를 따라 허름한 매점같이 생긴 곳에서 다시 왼쪽으로 옥양봉으로 난 산길로 접어든다. 한 20여분쯤 오르면 등산로와 관음전으로 나뉘는데 오른쪽 등산로로 접어들면 아기자기하게 친환경적으로 폐목을 이용한 계단이 산행을 안내한다.
이곳에서부터는 가파른 길 이이어지며 곳곳에 암벽지대가 산행을 더 어렵게 한다.
이렇게 1시간 20여분쯤 오르면 오양봉정상이다.
우리는 옥양봉정상아래 바위에서 사진을 찍고 옥양봉을 지나 석문봉으로 내달린다.
옥양봉에서 석문봉으로 향하는 1.75km구간은 약간의 난코스 암벽구간과 부드러운 오솔길이 펼쳐지다.
이렇게 50분쯤 산행하면 태극기가 휘날리는 653m석문봉정상이다.
석문산 조망은 뛰어나다.
오른쪽으로 서산시 해미읍 일대가 보이고 동쪽으로는 옥양봉, 북쪽으로는 일락산과 상왕산으로 이어진는 능선이 펼쳐진다.
정상석 돌비석에는 내포의 정기가 발원하다 라고 적혀있다.
다시 가야산 정상으로 향한다.
석문봉에서 가야봉 정상까지는 1.23km.
바람이 세차다.
벗었던 옷을 치매며 30여분쯤 진행하면 왼쪽으로 주차장으로 하산하는 안내판이 보인다.
벌써 선두는 가야봉정상에 도착, 되돌아 주차장코스로 하산을 하고 있다.
순간 후미가 선두로 바뀌는 상황이 연출됐다.
내심 600m급 산 이라고 쉽게 봤다 힘든회원들이 하산코스로 바꾸면서 즐거운 표정이다.
하산 또한 너덜 길로 녹녹치가 않다.
거기다 눈이 녹아 등산화에 붙은 흙이 하산을 어렵게 한다.
하산길에 산행들머리에 지나쳤던 남연군묘에 들른다.
산악회 고문인 최고문이 남연군묘의 유래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한다.
조선 8대 명산으로 손꼽히는 남연군묘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이구(李球 -1822)로 인조(16대)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이다.
그런데 그가 영조(21대)의 계보가 된 것은 그가 어릴 때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인 은신군에게 후사(後嗣)가 없자 그의 양자로 입적되었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이 그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실권을 잡기까지의 행적과 기행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흥선대원군은 철저히 자신을 위장하고, 안동김씨의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건달들과 어울려 지내는가 하면, 안동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풍수공부를 하며 전국의 명산이란 명산은 빠뜨리지 않고 찾아 다녔다.
그러던 차에 정만인(鄭萬仁)이라는 지관이 흥선대원군을 찾아와, “덕산 가야산 동쪽에 이대(二代)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오는 자리가 있는데 여기다 묘를 쓰면 10여년 안에 틀림없이 한 명의 제왕이 날 것입니다.
그리고 광천 오서산에는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가 있습니다. 이 두 자리 중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고 물었다.
흥선대원군은 망설이지 않고 가야산의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를 선택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이 지관을 따라 그 자리에 도착해보니 이미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고 더구나 묘를 쓸 자리에는 5층 석탑이 우뚝 서 있었다. 절의 탑 자리에 묘를 이장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흥선대원군은 차례차례 일을 벌여 나갔다.
그는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임시로 탑 뒤의 영조 때 판서를 지낸 윤봉구의 사패지를 그 후손에게서 빌려 옮겼다.
이때가 1844년이다.
다음 일은 가야사를 폐사(廢寺)하는 일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흥선대원군이 전 재산을 처분한 2만 냥의 절반을 가야사 중들에게 주고 절에 불을 지르게 했다고 하기도 하고, 당시의 충청감사에게 중국산 명품 단계벼루를 뇌물로 선사하여 가야사 스님들을 불러다가 강압하여 불을 지르게 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흥선군의 계략에 의해서 가야사는 폐사(廢寺)되고 탑의 뒷산에 임시로 모셨던 다음해인 1845년에 이곳으로 남연군묘를 이장하였다.
이때 지관인 정만인은 후에 도굴의 위험이 있으니 석회 3백 부대를 써서 관곽(棺槨)을 단단하게 다져 놓아야 한다고 하였다.
남연군묘 이장 후 흥선군은 둘째아들을 얻었는데 그가 명복으로 바로 고종황제다.
남연군묘를 이장하고 18년 후다.
대원군으로 정권을 잡은 흥선군은 가야사를 없앤 죄의식에 가야사와 탑의 은덕에 보덕한다는 의미로 가야골 상거리에 보덕사(報德寺)를 새로 지어 주었다.
그 후 고종황제의 뒤를 이어 순종이 등극하였으니 남연군묘는 지관 정만인의 예언대로 이대천자지지가 정확히 맞는 셈이다.
당시 이장 때 썼던 남은들상여(중요민속자료 제31호)는 그동안 광천리에 보관하고 있다가 몇년 전 남연군묘 옆으로 옮겨놓았다.
이 남연군묘는 1868년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의 도굴사건이 터지면서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강화하고 천주교를 탄압했던 계기가 됐던 사연도 안고 있다.
남연군묘에서 동북쪽으로 150m 정도 떨어진 청룡자락에는 문화재자료 제182호로 지정된 미륵불이 남연군묘를 등지고 골짜기를 향해 서있다.
그런데 이 미륵불이 돌아 서있는 이유에 대한 설이 분분하다.
북쪽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기 위한 일종의 풍살(風殺) 비보(裨補)로 세워진 것이라는 설과, 원래 가야사(伽倻寺)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흥선대원군이 가야사를 없애고 남연군묘를 쓰자 등을 돌렸다는 설이 있다.
2010경인년 마지막산행을 마치고 주차장에서 점심을 먹고 버스에 오르면서 모든 회원들은 오늘 저녁 준비된 망년회를 즐기기 위해 마음은 벌써 성남으로 향하고 있다.
출처 : 경기성남한울산악회글쓴이 : 7979kyk 원글보기메모 :'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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